Public(공중)에 대한 논의 — Dewey의 글과 학생 시절 작업 하나
최근 ’public’이라는 개념을 다룬 옛 논의들을 찾아 읽고 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대중’이라고 하면 소셜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크게 달라진 오늘날의 mass가 먼저 떠오르는데, 옛 학자들이 말한 public은 그것과 결이 다르다. 그나마 ’공중(公衆)’이 가깝다고 보고, 이 글에서도 그렇게 옮긴다. 옛 논의를 따라가며, 그것이 오늘의 도시계획과 설계에 무엇을 말하는지 정리해 보았다.
가장 먼저, Walter Lippmann은 Public Opinion(1922)과 The Phantom Public(1925)에서, 보통의 시민은 복잡한 공적 사안을 충분히 알 수 없으므로 ’공중’이란 사실상 실체 없는 유령에 가깝고, 따라서 통치는 전문가의 몫이라고 보았다. 엘리트주의나 기술관료주의로 비치는 이 회의론을 도시에 옮기면 익숙한 그림이 된다. 계획가와 정책 전문가가 도시의 서비스와 인프라를 설계해 공급하고, 시민은 그것을 받는 수동적 대상이 된다. 당시의 많은 실무적 경험과 현실적인 마찰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John Dewey는 The Public and Its Problems(1927)에서 다르게 보았다. 그가 말한 공중은 어떤 행위의 간접적 결과에 심각하게 영향받는 모든 사람들이다. 다만 근대 사회의 규모와 복잡성 때문에 이 공중은 아직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채 흩어져 있다. 그는 이 상태를 가려진(eclipse) 공중이라고 불렀다. 공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신을 인지하고 조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은 소통과 탐구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공중이 된다. 나는 이쪽이 도시를 다루는 데 더 쓸모 있는 관점이라고 본다.
도시설계 현장에서 이 차이는 작지 않다. 참여형 설계나 공공건축 과정에서, 전문가들이 주민을 설득하고 의견을 모으는 일에 지친 나머지 시민을 무지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 경우를 본다. 의도와 무관하게 Lippmann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의 소통의 장에는 대체로 목소리가 큰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분명한 집단만 모인다는 점이다. 정작 그 계획의 결과에 가장 크게 영향받는 다수는 그 자리에 없다. Dewey의 말로 하면, 그들은 아직 가려져 있다.
나의 학생 때 작업 하나가 떠올랐다. 2016년, 신촌을 대상으로 한 도시설계 스튜디오 결과였다. 그 지역에 누가 살고, 어떤 집단과 활동이 서로 엮여 있으며, 그 관계가 한 세기에 걸쳐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Actor Map이라는 다이어그램과 타임라인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 관계망에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대학에 속하지 않은 청년,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제안했다. 그때 나는 이 작업을 publics라는 말로 부르지 않았다. 설문이나 회의로 의견을 직접 묻는 대신, 사람들의 활동과 관계와 역사를 통해 그들을 드러내 보려 했을 뿐이다. 지금 보면 그것은 가려진 공중을 어떻게든 눈에 보이게 만들어 보려던, 서툰 시도였다.

물론 그때의 방법은 손으로 그린 다이어그램에서 멈췄다. 정량적이지도, 검증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질문이 남는다. 직접 묻지 않고도, 활동과 행태와 여러 매개를 통해 이 가려진 사람들을 드러내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 작업이 시민을 다시 관측의 대상으로 세우는 또 다른 통치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관측한 것을 그들을 대신해 판단하는 데 쓰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를 알아보도록 되돌려주는 일이 되려면. 근거와 데이터에 기반한 도시설계에 내가 끌렸던 이유는, 아마 이 질문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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